spoiler alert!
6개월 만에 보는 영화. 유머로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주는 임팩트도 대단한 영화. 그러나 임팩트로 설명되는 영화는 아니라고 느낀다.
웃으면서 보다가도 마음 한켠이 굉장히 불쾌해지는 면이 있다. 가장 불쾌한 것은, 어느새인가 그 부잣집에 들어간 가족들을 정말로 기생충이나 벌레 보듯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래서, 저 벌레들이 어떻게 치워지는 걸까 하고 이야기를 관망하다가, 아차 싶어서 스스로가 부끄러워 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는 가난한 자들은 착하고, 부자는 나쁘다고 이야기를 풀지 않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나도 회사에 기생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주인공 가족들이 수석을 들여놓고 돈을 벌지만, 부자가 되길 바라며 돈을 버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돈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 부터가 부자와 가난한 자들은 다르고, 이는 여러가지 장치로 표현되고 있다고 느낀다. 예를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바닥보다 더 밑에 있지만, 부자들의 집은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만 나타난다던가, 물한모금을 마셔도 부자들은 비싼 병에 담긴 물을 마신다던지.
수석의 의미가 뭘까. 단순히 가난한 자들이 운이나 미신에 기대는 것을 빗대는것 그 이상이 있을것만 같다.
영화 전체적으로 사회가 주는 서스펜스를 느낀다. 이선균이 송강호역의 가족들에게 말하는 '선을 넘지 마라' 하는 말의 의미가,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들하고 같이 어울릴 생각 하지 말고 선을 지켜라. 너희들이 우리에게 기생하는 사람임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이거봐라,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냄새부터가 우리와는 다르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송강호가 이선균에게 보여준 모습은 마치, '니네가 우리랑 얼마나 그렇게 다르냐' 고 되물으며, 그러한 기생관계를 탈피하기 위하 발악하는 가난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것만 같았다. 그러나 기생충이 숙주를 죽이고 나서 다른 숙주를 찾지 못하면 결국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다시 지하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가 기생할 숙주를 찾는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계획'과 연관한 대사가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가장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라고. 계획을 세우면 언제나 실패하니, 계획하지 않음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그로 인해 삶을 이어나가고자 나라도 팔고 집도 파는 것이라고.
그리고 스스로가 정말 벌레같았음을 자각한 아들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이러한 신분으로 부터 제대로 탈피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정말로 그것이 실현 가능한 일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겠다.
오랜만에 재밌는 오락영화. 자동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즐길것이 많았던 영화였다. 제목에는 포드와 페라리가 써있어서, 포드의 입장과 페라리의 입장이 나란히 배치되어 그리는 드라마가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페라리는 병풍일 뿐이고, 실은 비주류 v 주류, 순수한 열정 v 비즈니스, 개인 v 집단에 더 가까운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켄 마일즈라는 캐릭터가 포드의 대기업스러운 의사결정에 반감을 갖는 외곬수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아끼는 인간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것이 너무 좋았다. 이해해주고 응원하는 아내와 아들의 모습이 캐릭터의 부담을 덜어내고, 마음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요소가 된 것 처럼 느껴진다.
갈등이 많이 그려진 것은 쉘비인데, 레이싱 팀을 유지해야 하는 자신과, 켄 마일즈를 지지하는 자신,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의사표현 등, 쉘비가 느끼는 갈등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쉘비의 시점에 많이 이입했던 것 같다.
별개로, 등장했던 주요 차종들을 많이 알아본 것도 속으로 기뻤다. 처음 쉘비가 타고 나온 차는 포르쉐 356, 엔초 페라리를 찾아 협상할 적에 등장했던 메르세데스-벤츠 300SL, 그리고 포드 GT 프로토타입들. 등등.
처음에는 생활을 말하는 가벼운 노래로 시작하다가, 점점 무게를 더하는 공연. 나는 공연에서 그들이 자신들을 보여주는 방식이 너무 좋았다, 어느 한명이 더 튀어나오고, 뒤로 숨지도 않으면서,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애써 노래 하나에서 꼭 하나의 덩어리로 융합되려 하지 않고, 각자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었다.
덕원님이 친구의 우려와 다르게 노래를 잘 소화해서 좋았다. 목소리가 너무 좋은 사람.
그들에 대해 내가 아마 잘모르고 있었던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이 끝나고 좋은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멋진 하루를 만들어준 정보람님께 감사를.
처음의 그림은 단순히 아주머니가 문화센터에서 미술배우시고 여러가지 행복에 관한 추상적인 마음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부끄러운 생각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는 애뜻한 마음, 자기 내면의 어두운 것과의 싸움들이 그림을 보는 내내 애뜻한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색감이 뛰어난 판화로 자신의 작품을 다시그렸는데, 자신의 그림 세계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작가에 대한 생애를 자세하게 설명되지 않은점, 그녀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조심스러운 점은 약간 아쉽다 하겠다.
서석만과 함께.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지, 너를 둘러싼 관계들은 무얼 의미하는지 내게 묻는것만 같았다.
나는 초조함에 휩싸여 얼버무린채 서둘러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정보람과 함께.
사람 너무 많아서 그림이 잘 기억에 남지 못했다.
세상에서 제일 비싼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 뭔가 많은 사람이 구경을 온것 역시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그림 뿐만 아니라, 그 그림을 보러 온 많은 인파까지도, 전시의 일부가 된것만 같다.
다양한 색과 구도로 표현된 그림들에 눈이 새롭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을만 하겠다.
길쭉길쭉하고 눈이 처지고 팔자주름이 파인 그의 인물화가 좋다.
삶을 늘 찬양해오던 사람들의 말만 듣다가 인생은 고통이며 외로움이라는 그의 말은 얼마나 또 반갑던가.
내면에 형언할수 없는 감정을 끌어내어 보여주는 그의 회색빛의 그림에 마음 한켠이 다시 울적해 지는 느낌을 얻는다.
예술가로 성장하면서, 타인으로 부터 얻는 불완전한 명예와 돈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충실해 온전한 외로움을 끌어안은 그의 모습은, 내가 추구하고 싶으면서도 그러지 못한 이상향을 본것만 같다.
처음부터 미술과 디자인을 전공하진 않았으나, 작은 옷가게로 시작해서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가 된 폴 스미스.
사물과 색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모든 사물의 사진들을 모으려 노력한 결과, 다양한 상업적인 물건들에 자신의 색깔을 입힐 수가 있었던 폴스미스씨.
솔직하게, 그냥 지갑 이쁘게 만들 줄 아는 아저씨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걸 보니 좀 다르게 느껴지긴 합니다.
하지만 패션을 잘 모르는 나로써는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전시였는데, 전시 볼륨이 가격에 비해서는 다소 작았던 것이 일단 아쉽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갖고 있는 패션 철학이나, 디자인 방법, 자신이 좋아하는 색과 패턴을 고르는 감각이 형성된 과정을 모두 드러내진 않았던 것 처럼 느껴졌다. 영업 비밀인건가.
눈이 즐거운 광고를 보고 온 느낌이 든다. 여러모로 상업적인 브랜드이며, 그런 전시라고 느꼈다. 상업주의의 일면을 보고온 느낌. 광고를 보고온 느낌.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것은, 광고를 돈주고 봤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공연표를 협찬해 준 박상욱님께 감사를.
즉흥적으로 다녀온 전시. 한국의 근현대사에 미술이 어떻게 파고들고 있는지 알려주는 전시. 근현대사의 중요한 일들에 미술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반대로 미술이 어떻게 사회의 영향을 주는지 보고 느낄 수 있는전시. 국사가 약한 나로서는 국사공부를 하는 느낌이 들어서 영양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그러나, 아직 제묵의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보통 '광장'이란 단어를 들으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목소리가 떠오르고는 하는데, 아직은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보통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떠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당대의 지식인들, 조선의 끝자락을 어렵게 버터나갔던 사대부들의 미술들이 많아서, 아직은 미술이 민중사회에 깊게 파고들지는 못한것 같아, 시대적인 한계와 안타까움을 느낀다.
구한말부터 해방까지를 4부로 나누어 전시로 보여주고 있는데, 주제상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1부 전시였다. 1부 전시는 구한말의 사대부들이 그렸던 4군자와 산수화들이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 이 그림들만 보았다면, '사대부들은, 세상이 어지럽고 민초들이 힘들적에도 그러거나말거나 지들 취미만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사대부들은 민영환 처럼 자결을 했거나, 지방에 내려가 후학을 도모하거나, 사군자를 실제로 시장에 내놓아 자금을 마련하고, 산수화를 통해 의병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직분에서 조선에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던 것이다.
그러한 배경을 듣고나니, 흐드러지게 핀 매화와 곧게 뻗은 대나무 줄기가, 사뭇 다르게 보였다.
5월과 사소한 행복과 여인들을 좋아하던 작가.
마침 무심코 지은 나의 영어 이름도 may, 5월이었네.
작가가 가지고 있는 담대함이 너무 부럽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격동하는 현대사를 겪으면서도 어쩜 그렇게 강인한 나무가 되셨나요,
저는 당신에 대해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채, 너무도 다른 시대를 살아가며 당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또 나아갑니다.
무인도에 갖힌 소년들은 처음에는 공동체를 만들어 사회를 이루고자 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대립과 반목이 일어나고 두가지의 패로 갈라지고 만다. 그것이 마치 인간이 가진 '지성'과 '야만성'으로 나뉘어 지는 것 처럼 보였고,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으레 그렇듯, 지성은 야만성에게 힘 없이 밀려나는 것 처럼 보였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했던 두가지는 구조요청과, 식량 두가지였을 텐데, 아마 이 둘을 위해서 필요한 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돼지' 소년의 존재는, 둘은 서로 대립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공존했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는 그러지 못하고 극한으로 치닫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이란 것은 너무도 무력한 것이어서 끝내는 야만한 것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에 영국측의 군인이 이러한 소년들의 대립을 '영국의 어린이 스럽지 않다고' 나지막이 나무라는 부분은 너무도 허망하게 느껴졌다. 자기네들도 전쟁을 함으로 인해 야만적으로 대립하고 소년들을 섬에 고립시켰으면서 그런말 할 자격은 사실 없지 않나 싶음.
뭔가 마지막에 '야만성'을 대표하는 집단의 대장인 '잭'이 눈물을 흘렸던 것은 그러한 무력감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번역이 정말로 최악이다. 왈도체인가.
사회로부터의 완벽한 이방인이었던 주인공. 그가 세상에 대해 마음자세를 바꾼 것은 태양에 대한 자세를 바꾸면서 부터인 것 처럼 느껴졌다. 부모의 장례식도, 충동적으로 저지른 사건도, 자신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 재판도, 그놈의 태양이 문제였다.
그는 부모의 죽음이나, 연인의 사랑과, 적에 대한 적개심도 자신이 지금 느끼고있는것 그대로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지 아니하고, 자신을 둘러싼 것을 하나로 엮고, 그것을 위해 없었던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자신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의도'를 만들어내어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를 썼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자신을 찾아온 신부를 거의 쫓아내다싶이 하며 토로해내었던 '존재'의 의미를, 토로하고 난 다음에야 이해 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역시, 그대로 받아들어 의연해질 수 있게 되었다.
작가가 열린 결말로 끝내버리긴 했지만, 작가는 이미 작중에서 주인공의 토로를 통해 하고싶은 말을 다 했을테니까.
태양의 의미가 무엇일까. 견딜수 있을만한 역경이었을까.
이제는 거의 희미해져버린 이웃의 이야기. 공동체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 뛰쳐나온 현대인의 외로움을 논하는 이야기. 시골을 벗어나 아파트를 살아가는 시대의 남녀 이야기를 그린 것임에도,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가 그려진 탓에,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책이 짧아서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짧게 여러번에 걸쳐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다 읽고 나서 엄마에게 추천하며 건네드렸다.
무심코 집었는데 희곡. 그래서 개인 통산 처음으로 읽는 희곡. 책을 읽고 매우 슬퍼졌다. 아버지 모습을 본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읽어내려갈 적에는 일견 늙은 샐러리맨의 모습이 한심해보였다. 자신을 드러내는데에 어색하고 억센 자존심과 허풍속에 자기 자신을 감추고,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호의를 뿌리쳐 버리는 모습은 뭔가 너무 낯이 익다. 남의일 같지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을 위한 일이었으며, 그저 가족을 지키고 자신을 돌아볼 방법을 모르고 서툴렀기 때문에 잘못된 방법으로 나아갔던 것 뿐이었다.
세일즈맨의 아들은 다시 현실을 볼 수 있을까. 아들은 다시 현실을 볼 수 있을까.
'내'가 순수한 악이 되어 악의 궤적을 쫓아가는건 너무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처음엔 내가 그러한 악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 같아서 일견 다행스럽게 느꼈다.
그런데, 소설이 중반으로 이어져 '이 악행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짓고 나서는 그 행동 궤적이 예측 가능한 범위로 들어왔고, 화자는 거의 그대로 행동했다. 우리는 '악'이 무엇인지 규정할 줄 안다는 의미이겠지 싶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을 선이든 악이든 아무것도 규정짓지 않고, 그저 생존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생존이 단순히 먹고 자는 생리적인 욕구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부터 모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모든 도덕적 가치를 배제하고 이득과 손해만을 계산해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규정한 도덕이라는 울타리가 만약에 없다라면, 인간은 반드시 악의 선택지만을 골라서 행동하고야 마는 것일까?, 화자의 궤적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악행이라고 규정한 사건과 역사가 이미 그렇다고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읽고 난 다음에 나는 엄청난 긴장과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 너무도 외롭고 불쌍한 소년 한스 기벤라트.
재능있는 소년 한스 기벤라트는 결국 어른들의 잘못된 마음으로 인해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무슨짓을 하는지조차도 몰랐겠지.
그러나, 나는 마냥 이것이 어른들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한스 기벤라트에게도 어떤 순간마다 발언권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마저도 어른의 기대에 억눌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탈선하고 만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가 사모했던 소년이 그를 떠나지 않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가 그를 농락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까? 나는 그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아마 그런 일이 있었을때의 일렁임을 느끼지 못한채 자라왔다면 한스 기벤라트도 자신을 대했던 어른과 같아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때와 같은 비슷한 정서와 비슷한 문체를 느꼈다. 읽기 쉬우면서도 깊은 고찰을 담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읽는 내내 가렵고 따가웠다. 때로는 흥미로웠다가, 때로는 날카로워서 다음 문장을 읽기가 꺼림직 했다.
이 책에서도 여성문제가 많이 거론된다. '미러리즘' 단편에서 남자가 약제를 통해 여자로 변했다는 것과, 그렇게 변하고 나서 느끼는 공포가 '테러'와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 인상깊었다. 단편의 마지막 단계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친구에게 토로하는 모습이 남자인 내가 읽는 입장에서는 불편했던 것이, 자신을 보편적인 남자로 일반화 하면서 남성 전체를 가해자로 보는 시각이 느껴졌다. 읽었던 적 있던 '82년생 김지영' 에서 소설 곳곳에 주석을 달아 소설이 아니라 프로퍼간다 성을 갖게 하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요즘의 페미니즘적인 사회분위기와는 별개로, 이 책에서 나타나는 일들 처럼,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과, 공포가 어떻게든 '존재'하고, 타개해 나가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게도, 래디컬 패미니즘은 자신들의 문제를 올바른 문장으로 옮겨서 목소리 내지를 못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 메시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여성차별문제'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것이 개인의 문제라고 말하기 까지 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마치 '초원복집'사건 처럼. 성별 갈등이 불러 일으켜지고, 각자의 주장이 논리를 잃고 양 극단으로 '편가르기'식 논리로 가는 것만 같다. '여성차별'이란것이 있다 없다 하는 논리로만 재편되는 것 처럼.
공교롭게도 새 정부가 들어오고서 성별 갈등이 시대의 아젠다가 되고 오랫동안 결론을 맺지 못한채 어느덧 '전쟁'이 되어가는 것 처럼 느껴진다. 논리적인 대화를 할 사회적 장이 마련되면 정말 좋을텐데. 그러나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자들은 이러한 갈등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만 같다.
'삶'을 주제로 하는 책이며, 그에 앞서 작가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서 삶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생각나는 대로 적자면,
1. 작가는 이념과 사상으로 나누어 갈라선 우리나라의 과거,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져 온 현실을 슬퍼하고 있는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념을 초월하는 일이며, 인간이 오롯이 곁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념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보는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이념과 삶을 분리하여 생각한것 처럼 느꼈다. 그래서 그는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그리고 그 재료가 된 메밀을 생각했고, 삶의 도구가 된 삽과 곡괭이를 숭상했으며, 우리나라에서 출발한 열차가 북녘에 닿았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랬다.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도 있다. 나는 대체로 정치가 인간삶에 꽤 크게 연관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정치논리는 대체로 사람들은 사상논리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부분을 콕 짚어 주면서 인간생활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기를 바랬으나, 그러지 않고, 그저 정치와 삶을 분리하며, 이념의 폭력을 손가락질 하는 것은 다소 무책임한 어른의 태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스마트폰 만을 다룰줄 알며, 삽을 다루지 못하는 젊은이를 욕하는 시장의 상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작가의 모습은 개인적으론 솔직히 별로였어.
2. 작가 자신이 쓴 글인 '칼의 노래'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는데, 그 글을 읽은 적이 있는 나는 부끄러워졌다. 작가의 의도를 떠울리며 다시 읽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담대하게 세상에 맞섰던 이순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만, 책을 읽을 적에도, 이순신의 적은 단지 왜군이었던 것이 아니라, 이순신을 둘러싼 모든것이었고, 이순신은 그저 견뎌내야했던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가 해석할 여지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자신이 이순신을 서술한 의도를 글로 풀어주신것에 의외성과 감사를 동시에 느낀다.
나는 정치도 삶도 잘 모르고, 그저 연필이 아닌 노트북과 인터넷으로 쓸 뿐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생각을 들여다 볼수 있는것은 즐거운 일이다. 작가 스스로는 그것을 부끄러워 하고 있지만 말이다.
작가가 서두에 말한 '휴머니즘'에 대척되는 허무주의에 크게 공감한다. 인간은 크게 대단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일들은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어있지만 실은 우연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너무 긍정적으로,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되, 냉정하게 판단하고 앞으로 올일을 준비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해설해주는 자신이 썼던 책들의 주제의식과 의미도,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책을 다시 읽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한 존경을 넘어서 함부로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마저도 든다. 해군에서 복무하고, 해군과 연계해 구조활동을 펼치는 모습, 환자가 아닌 다른 것에 고통받는 모습은 이순신과 닮아 있는데, 본인 또한 책 '칼의 노래'를 많이 읽었다는 말은 독자로써 전율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이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며 칭송하는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본인 역시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를 찬성하는 사람과 그를 반대하는 사람 모두, 그가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는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의료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들을 타파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어왔다.
처음에 이 글을 접하고 읽는 동안에, 이 사람을 음해하는 의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고는 '어떻게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으로써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뉴스 기사의 댓글의 의견중에는, 이국종 교수가 만성 적자에 시달리며 유지할 수 없는 '중증외상센터'를 순전히 본인의 초인적인 의지와 능력으로 유지하면서, 대중들은 다른 의사들에게도 이국종 교수 만큼의 잣대를 들이대며 비난하고, 병원내에는 이러한 적자와 시스템의 문제가가 다른 병과에도 퍼지게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말처럼 세상은 정말로 만만하지 않고, 어느 것 하나 쉽게 문제를 풀수 없다는 것만 체감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의 존재를 신격화 하던, 공공의 적으로 만들던, 이 사회에서 벗어난 '특별한 존재'정도로 취급하고, 그들의 행동과 말들을 '그 만이 할수 있는 특별한 소리' 정도로 규정하고 이 사회와 격리시키려는듯 하다. 그리고 최근 '여기까지인가' 라고 발언한 이국종 의사의 영상을 보면서, 정말로 우리사회가 '여기까지인가'보다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두번째 읽는 책인데도 어렵다.
1. 나는 사실 주인공처럼 살인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주인공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는듯 하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적에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으나, 이번에 읽을 때에는 주인공이 생각한 바를 그런대로 잘 따라가면서 읽게 되었다. 주인공은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태양 빛을 잘 견디지를 못했고, 어떠한 사건들에 감정이 크게 동요하질 않았다. 그리고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은 뭔가 인간적인 매력같은 것이 있어서, 그를 잘 따르는 주변인이 있다는 것 정도 일 것이다.
2. 주인공은 접견온 사제의 여러 말에 반박했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을 듣고 분노와 환희에 섞여 사자후를 내질렀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줄거리를 따라가자면, 이 때가 진정으로 타인이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자신을 위해 해준 말이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3. 그래서 시작에서 어머니의 타계 소식을 듣고 크게 감정의 동요가 없던 주인공은 마지막에 이르고 죽음을 앞두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면서, 어머니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며,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그는 새로운 시작을 경험하기 위해 사형장으로 향하면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것 처럼 느껴졌다.
4. 주인공에 대한 판결은, 결국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유로 사형으로 판결되고 만다. 최근 독도에서 구조활동을 펼치던 헬기가 추락해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그 중 한명은 결혼한지 얼마 안된 청년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만약 그 사람이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면, 그 죽음은 더 가벼운 것이 되는건가.
5. 별개로, 두 번째 읽은 이 책은 첫번째와는 다른책이어서 번역자도 다르다. 그런데, 첫번째에 읽었던 책과 번역이 특별하게 더 좋았던지는 잘 모르겠다. 책 가장자리에 이 출판사에서 내놓는 책들이 몇권 소개되어 있는데, 유독 이사람이 번역한 책에는 '완전한 번역', '유일한 번역' 따위의 글귀들이 써져 있었다. 번역 잘했다는것 보단 책의 본질을 소개해야 되지 않나 하고 생각.
소설집이다. SF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는다.
과거로 되돌아 가더라도 그 과거를 절대 바꿀 수는 없으며, 다만 과거를 더 잘 알고 회개하여 미래를 걸어나갈 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대교주에게 했을까. 대교주에게 무슨일이 있던것일까? 내가 소설에서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은 아닐까?
공기를 기억의 매개로 삼고 있음을 발견한 어느 기계인간의 기록을 담은 이야기. 크롬 벽으로 공기의 압력을 지탱하며 살아가는 세계의 이야기.
수은계의 수은계 속을 들여다보면 혹시 이런 세계가 펼쳐져 있지 않을까 싶은, 스팀펑크가 떠오르는 매력적인 이야기… 이긴 한데,
스토리 설정에서 보이듯이 폐를 교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계인간이라면, 그들의 기억 방식이 마치 사람의 기억 메카니즘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기억장치여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이 뒤에도 기억에 연관된 짧은 소설이 나오던데, 인간이 인간다워 질수 있는 특징중의 하나는 기억의 망각인 것일까. 엔트로피가 높아지듯, 응집되어있다가 흩어지듯이 기억도 그렇게 흩어지는 것일까.
짧은 글. 만약 어떤 장치가 어떠한 사람이 누르려고 할때 그 1초 전에 점등한다면, 그래서 미래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인간의 전제가 무너진다면, 인간은 어떡할까? 아니, 인간은 어떡할 까 하는 질문조차 의미가 없으므로, 달리 할일이 없어져 기록을 남겼다는 이야기. 이런 장치가 발명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아니면, 뒤집어서 이야기 해보면 이런 장치 자체가 현실에선 절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반대로 무엇이든 할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것만 같다.
제목이 왜 이렇지. 심지어 내용도 제목과의 연관성을 이끌어내려면 꽤 오래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가장 주된 테마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사실은 실제와 다를수 있고, 그것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가 정말로 남들이 생각하는 자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짧은 글, 왜 짝사랑 하는 이가 그 대상에게 해주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걸까. 나도 앵무새가 되고 싶다. 잘 있어, 사랑해 하고 말해줄 수 있는.
바람이고 싶어- 강물이고싶어- 그대기억속에- 옴파로스-
뭐지? 평행세계이야기인가? 과학과 종교가 결합해 가설과 결론을 내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것인가.
또다른 평행 세계 이야기. 자신이 결정한 것에 진정 책임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