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풍자적이면서 메세지에만 매몰되지 않은 그런 영화. 너무 재밌었다.
영화는 한 아파트, 그것도 단지 안에서 하나의 동 만을 제외하고 원인모를 천재지변으로 인해 모두 무너진 아포칼립스와 같은 상황에서, 주인공 부부가 집안에서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바깥 상황을 걱정하는 모습에서 영화가 출발한다.
또다른 주인공 이병헌은 의도치 않게 아파트 주민들을 대표하는 자리를 맡게 되면서 뜻하지 않게 권력을 쥐게 되고 만다. 그리고 이 권력이 이병헌이 가지고 있던 인간성을 점점 잠식해나간다.
이병헌과 협력하던 박서준도 아파트를 위한 일들에 나서면서 점점 그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재난 초기에 아파트에 들어와 살고자 했던 외부인들과의 갈등이 아파트 내부인들의 무력으로써 해소됨으로써 외부와의 갈등이 애매하게 매듭지어진 채로 극의 국면은 내부자 갈등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이병헌은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었던 집이었고 집단을 위해 노력했지만, 마지막에 집에 들어와서도 누군가에게 발자국이 찍히며 끝내 자기 집을 만들지 못하고 만다. 이때 깔리는 '집 내집 우리집' 하는 동요가 이병헌의 상황을 너무도 비극적이게 만든다.
주민투표에서 사용된 바둑알, 이병헌이 부동산 사기 가해자와 격투하면서 입에 넣었던 바둑알은 우리 사회 깊숙하게 자리잡은 흑백논리를 뜻하는 것만 같다. 결국 이 아파트가 가지게 된 '우리 아파트 아니면 적' 이라는 배경의 논리는 마지막에 파국을 맞으면서 아파트를 누구도 생존하지 못하는 디스토피아로 만들어 버리고, 그 과정에서 박서준과 박보영은 생존을 위해 결국 아파트를 떠나고 만다.
박서준이 부부인 박보영에게 마지막이 되어서야 이름이 제대로 불리게 된 것도 집단 속에서의 인간성 파괴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우리편 아니라는 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와, 사람과의 신뢰가 무너진 세계에서 형성되어 버린 집단의 힘이라는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인간성을 파괴시키는지 자연스럽게 목도하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박보영이 새로운 생존 터전에서 던지는 질문인 '여기서 살아도 되나요?' 질문에, '이상하네요, 사는건 그냥 사는거지 누구한테 물어볼게 있나요' 하는것이 결국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해답이라고 영화에서는 말하는 것만 같다.
제목이 '유토피아'라는 것에서 이미 유토피아 스럽지 못한 전개가 될것을 암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으로만 봐서는 통계를 잘 읽는 법, 잘 해석하는 법에 대해 논하는 책일 줄 알았는데, 세상에 흩어져 있는 통계와 기록들을 통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의 인류가 지속하고 있는 경제 성장, 기술 개발이 정말로 맞는 방법인지, 우리가 사는 개인들이 이 정보를 해석하고서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면 지속할 수 있는지를 논한다. 이 때, 한 두가지의 숫자만 가지고는 그 해석이 왜곡되기가 쉽기에, 저자는 다른 관점의 통계, 그리고 단순히 현재의 숫자만을 가지고 논하지 않고, 근대부터의 변화들을 가져옴으로써 지금의 통찰이 유효한 것인지 검증한다. 즉, 넓이 뿐 아니라, 깊이로써도 숫자를 찾아보고 이를 합쳐서 해석한다.
특히, 무어의 법칙으로 반도체 집적률이 상승한다고 해도 다른 기술이 그에 부합하여 성장하지 못하기에 전반적인 인류 기술이 그것에 맞게 발전하지 못한다는 점, 풍력/ 태양광과 같은 친환경 에너지들의 소비율을 늘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화석 에너지의 사용도 수반된다는 점, 일본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소식에 있다는 점을 통계치를 통해서 해석하고 보여주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다만 그러한 글 바탕을 보면서 글쓴이가 짚은 부분에 대해서 다소 의문 스러운 부분도 있다. 예를들면 '전기차를 도입하는 것이 그리 친환경적이지 않을 수 있다' 는 챕터가 그것인데, 글쓴이는 전기차를 만들 때 사용하는 중금속, 전기차가 사용하는 전기가 화석연료에 기반해서 생산된다는 점에서 전기차가 생각보다는 친환경적이지 않다고 서술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이를 내연기관차에 비교해서 최종적인 탄소 배출량이 어느정도 되는지 지표가 있다면 논조가 조금 더 설득력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항상 특정한 명제가 주어졌을 때, 반대편의 관점이 될수 있는 지표와 통계를 함께 가져다가 심도있기 들여다 보는 것은 즐겁다. 요즘같이 도처에 정보가 깔려 있을때 특히 그렇다. 이 책으로 하여금 사건을 객관적이고, 느긋하게 바라보는 습관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글을 너무 멀리하며 살아오니 줄거리가 있는 독서를 해서 독서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마침 집에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있었기에 빌려서 읽기로 한다.
인간과 똑같이 만들겠다는 목표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가, 그 온실속에서 우연한 일로인해 납치되어 모험을 펼치는데, 이때 맞딱들이며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날카로운 질문에 대답해가며, 결국 인간화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최근에 접한 미디어 중에서 애니메이션으로는 에반게리온이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 인간과 인간사이 올바른 소통의 방법과 소통의 의미, 그리고 단일 의식의 통합 또는 개별 개체로써의 존재를 대립시키며 '인간이란 무엇이냐'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을 보면서 특히 에반게리온을 많이 떠올렸다. 두 미디어 모두 '하나의 의식으로 통합하여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를 보완'할 것이냐, 아니면 '각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미숙함을 받아들이며 서로 소통하고 때로는 싸우며 개별적인 의식들을 성장시킬 것'이냐를 가지고 싸운다. 그런데 에반게리온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세기'를 통해 풀어나가는 반면, 이 책은 완전히 기계화된 클라우드 의식이자, 더이상 쓸모없어진 기계들을 거두어 기계들의 부처로써 존재하고 있는 '달마'라는 존재를 이용해 불교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나는 기독교를 잘 모르지만 에반게리온은 인간이란 그 존재의 시작부터 '죄'를 짊어지고 있고, 그것을 속죄하기 위한 고행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자아가 성숙한다는 이야기를 품었다고 느꼈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달마'를 통해서 '고통'의 관점에서 인간다움을 논한다. '생명의 삶이 잠깐의 환희가 끼어들어있는 고통의 연속이라면, 그 존재의 죽음은 고통의 종료를 의미 하는 것이니 삶을 지속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기 어렵다' '현재의 육체가 받아들이는 마음, 몸의 느낌이 만들어내는 것이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해 기계의 클라우드 환경에 의식을 의탁하고 개체들의 모든 의식을 통합하는 것이 고통을 해방하고 의식을 성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냐' 라는 질문을 던진다.
작가 이석원이 책을 쓰기 싫은 와중에 강연을 제안받아 다니며 자신의 삶의 의욕을 다시 충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의 강연 내용을 담은 책.
세번의 강연을 3개의 챕터로 나누어 책에 실었다. 사람과의 관계 설정, 인생에서의 선택, 창작의 이유로 나뉘어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석원은 자신이 사람을 대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었고, 사람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거리가 유지된 상태에서 사람을 판단할때, 어떠한 정보를 통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언제나 다른 정보를 수용함으로써 수정할 수 있는 상태 즉, '단정'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관계는 상호의 이해가 다르고, 상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바도 다르기 때문에, 언제나 수정할 수 있는 상태로 두어야, 고통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두번째 부분인 선택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선택 자체보다는 삶의 궤적에서 겪었던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을 소개하고, 선택을 위해서 많은 경험을 해야 하며, 성공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 '자기주도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운'의 요소가 불확정적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잘못되더라도 자신을 탓하지 않는 태도를 통해 고통을 줄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세번째 부분인 창작의 이유에서는 창작자로 삶을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전하는 말을 하는 것처럼 읽혔다. 창작은 입력받은 만큼 출력으로 나타나기에 입력이 중요한데, 양적으로 입력에 집중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자신을 형성하는 안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실력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것이 '실전능력' 이라고 한다. 즉, 자신의 창작물을 항상 바깥에 '두려움없이' 드러내고, 평가에 담대해질 줄 알아야, 창작의 힘을 기를 수 있다고 전한다. 더하여 창작을 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어떤것을 창작할지'구체적'으로 자신이알고 있어야만 한다.
사람에게 많이 스트레스를 느끼고, 그럼에도 참으려고 노력하며, 무엇하나 제대로 좋아하지 못하는 작가의 성격은 나와 교집합이 있다. 그래서 이사람의 첫 책인 '보통의 존재'를 읽었을 때, 그 비뚤어짐에 이끌려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느새인가 이 사람도 점점 반듯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책을 읽으며 느껴지면서 조금은 심술이 나고는 했다. 지난 책 '2인조'를 읽으며 그런 느낌이 특히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석원이라는 사람은 강연에서 말하는 것도, 책에서 말하는 것도 하나같이 '자기 자신' 이다. 강연에서 말했던 것 처럼, 타인에 대해 단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조차도 단정하지 않으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라는 문장을 싫어한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듯이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변화하고 있다. 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고찰이고 그것을 타인에게 말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도 타인에게 말할 적에 듣는 사람이 기분좋은 피드백을 해주면 그것만큼 뿌듯한 일이 없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말하는 것도 하나의 '창작' 이라면 나 역시도 말하려는 것을 '구체화'하고 '운'이 닿을때 까지 노력하며, 타인을 단정짓지 않는다면, 나를 위해 덜 고통스럽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월북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벌이는 기행이 어떤 궤적을 그렸고, 그 궤적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일들을 겪고서 하나의 사상, 또는 어떤 시대정신을 가지게 되고, 그 생각을 완성시켰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자유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것 같았다, 단순히 어떤 사상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있지 않되, 자유롭게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반발했다. 그렇게 자유롭게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 부터 해방하기 위해 행동이 필요하다고 마음 먹었고, 그것이 높으신 분들과, 일부 대중들에게는 반감을 사기도 했을 것이다.
분단과 민족의식이 희미해지고 다시 사람들이 먹고 살기 바빠지는 시대가 되는 것은 그가 겪었던 격동의 세월과 다르지 않을 텐데, 만약 그를 만난다면 지금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 직접 찾아가 물어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수인 2권 독서 계속 진행중.
역시 이석원 아저씨의 글은 잘 읽힌다. 잘 읽혔다고 해서 그 내용을 잘 이해했다는 것은 아닐테지만.
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글에서, 처음에 층간소음에 대해 고통을 겪는 것으로 글의 내용이 시작된다. 그리고 층간소음의 원인으로 추정하는 바로 윗층의 사람이 냉면집 사장이라는 정보를 어디선가 듣고는 찾아갔는데, 그 냉면이 일생일대의 냉면임을 알게 되고 냉면집 사장을 무조건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냉면집 사장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사회성이 낮은 자신의 성향과는 반대로 온갖 사회활동을 해가며 냉면집 사장이 누구인지 수소문한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우연하게도 전혀 인연이 없을것 같은 사람과 인연이 닿아서는 급하게 사랑이야기로 급진전된다. 인연을 맺은 사람에 대해 감정이 커져가면서, 층간소음도, 냉면에 대한 집착도 점점 작은 일들이 되다가, 결국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순식간에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일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주인공이 겪은 일들은 그냥 보기엔 그냥 일어난 일들이 그저 나열될 뿐이고, 처음에 집착하고 있는 일들은 너무도 쉽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고, 문제라고 여겼던 일들도 그냥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해결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야기가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인공이 너무 몰두해가며 고민하는 것을 내려놓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삶의 자세를 고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처음 이사하며 겪었던 층간소음에 너무 몰입해서 어떻게든 윗층의 사람을 만나려고 했고, 그렇게 만나려고 정보를 수집하다가 냉면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갔더니, 어릴적에 먹었던 아주 맛있는 냉면을 떠올리며 무조건 냉면집 사장을 만나겠다고 자신의 천성까지 꺾어가며 동아리 활동을 하는 등등, 또 몰입했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연인을 만나고 나서는 손을 잡네 마네 하면서 또 몰입하고 집착했다. 달라지는 부분은 이때 부터인데, 뭔가 꼭 몰두하고 집중해야만 하는 그의 천성에 대해 연인은 다른 삶의 자세를 제시하는데, 그냥 대화 채널만 열어놓고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야구 중계 관람을 한다던지 하는 등, 그에게 사람을 대하는 다른 방법이 있음을 알려준다. 게다가, 이렇게 연인과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냉면은 아무때나 먹을 수 있으니 이걸로 장사를 해야 한다느니 하는 집착은 어느새 사라져버렸고, 층간소음이라고 생각한 밤중의 소음은 알고보니 엘리베이터가 내는 작은 소리였다.
아마도 중요하다고 여기며 집착하고, 전혀 변하지 않을것 같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변한다는 것이 화자가 하고 싶은 말인 듯 하다. 게다가 글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이 글은 마치 작가인 이석원 본인이 직접 겪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층간소음을 피하려고 다른 집을 얻은 일도, 냉면집 사장을 만나겠다고 자신의 천성까지도 버려가며 동아리 활동을 나서서 했다는 것,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화이글스 팬이라는 마음을 숨기고 기아타이거즈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은 소설처럼 느껴진다. 이 두 부분을 노린것인지, 작가는 이번에도 이 글을 '산문집'이라고 붙였다. 소설이냐 수필이냐를 따지지 않고, 그냥 시가 아니니까 산문. 생각해보니 예전에 '언제 들어도 좋은말'을 읽을때도 그랬네.
자잘한 고증 오류가 있다. 주인공이 좋아하는 팀인 한화 이글스. 연인이 좋아하는 팀이 기아 타이거즈. 그런데 야구를 보러 간 곳이 잠실 야구장. 설령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만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중립구장 규정이 없으므로 두 팀이 잠실구장에서 경기할일은 없다. 설마 이 오류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말하게 만드는 장치인건가?